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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에게 물어봐/미디어 이야기

인터넷 규제법의 운명


인터넷 규제법의 운명


민경배 정책위원 | 경희사이버대학교 NGO학과 교수


지난 9월 말 신문지면 한 구석에서 사문화된 국가재건최고회의법이 폐지된다는 기사를 봤다. “아니! 5.16 쿠데타 때 만들어진 이 법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단 말이야?” 별 뉴스거리조차 못됐던 이 기사가 자꾸 신경 쓰이는 것은 요즘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인터넷 규제 법안들과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 했다. 인터넷 규제 법안들의 미래 역시 국가재건최고회의법처럼 사문화될 운명이 뻔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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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유명무실화 되어버린 인터넷 규제법도 있다. 2001년부터 시행된 인터넷 내용등급제가 그렇다. 청소년들을 인터넷 음란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마련된 이 제도는 당시 사실상의 인터넷 검열제도라는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입법화되었다. 그 직후 자신의 누드 사진을 게재한 중학교 미술교사 김인규씨의 홈페이지와 동성애 커뮤니티 사이트 ‘엑스존’이 음란 사이트로 규정되어 강제 폐쇄조치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표현의 자유 논란이 촉발된 일도 있었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강행한 인터넷 내용등급제가 과연 지금 청소년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주는 안전장치로 온전히 기능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용등급제가 적용된 19등급 사이트는 부모들의 주민등록번호로 입장하면 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내용등급제 사각지대인 P2P를 통해 얼마든지 음란의 바다로 향할 수 있다. 인터넷 내용등급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청소년들이 음란물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래서 여전히 많은 학부모들의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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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실명제도 마찬가지이다. 표현의 자유 침해와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게시판 인터넷 실명제는 악성 댓글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라 주장되었다. 하지만 게시판 실명제는 결국 별반 효력이 없는 조치였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지난 1년 여 간 하루 평균 30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포털 등 주요 사이트에 게시판 실명제를 적용해 왔으나 악성 댓글은 도무지 근절될 기미가 없다.

이쯤 되면 다른 방안을 모색하는게 현명한데, 놀랍게도 정책결정자들은 오히려 실명제 적용 대상을 하루 평균 10만 명 이상 이용 사이트로 확대하겠다는 역발상을 서슴치 않고 있다. 코마 상태에 빠진 게시판 실명제에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고 부질없이 영양제를 주사하려는 꼴이다.

최근 입법 예고된 사이버 모욕죄의 운명도 어찌 될지 벌써부터 조짐이 보인다. 얼마 전부터 네티즌들이 색다른 선플 달기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플과 달리 마냥 착하고 예쁜 말만 담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댓글에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잔뜩 쓰고는 “이렇게 잘하는 정부 처음이다. 최고야 최고”라며 반어법으로 조롱하는 식이다. 액면 그대로 보면 욕설 한마디 없고 오히려 칭찬을 했으니 사이버 모욕죄에 걸릴 염려는 없는 명백한 선플이다. 이제 겨우 입법 예고 단계인 사이버 모욕죄가 벌써부터 네티즌들에 의해 무력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오프라인 모욕죄 자체가 대부분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미 폐지되었거나 사문화된 상황인데, 시대를 거슬러 난데없이 튀어나온 사이버 모욕죄란 것의 운명이 어찌 순탄할리 있겠는가 말이다.

진작 사문화된 국가재건최고회의법조차 40년을 훌쩍 넘겨 세간의 관심에서조차 지워질 때까지 모진 생명력을 이어 나갔다. 효력도 없이 부작용만 큰 인터넷 규제법들은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랫동안 사문화된 상태에서 먼지 쌓인 법률집 페이지만 차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금방 사문화될 운명을 지닌 인터넷 규제법들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이 세상에 나올지 모르겠다. 입법 낭비, 이제 냉정하게 검토해볼 일이다.

(디지털타임즈, 2008.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