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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 상담 연재

촛불집회에서 찍힌 내 사진이 일간지와 잡지에 돌아다녀요



촛불집회에서 찍힌 내 사진이 일간지와 잡지에 돌아다녀요


가을이 물씬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해가 지면 스산한 바람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데이트를 한 대서 나온 시청 앞 광장에 남자친구는 싫다는 나를 질질 끌고 촛불 집회하는 곳으로 데려갔다.


  “대학생의 정신이 뭐냐? 사회적으로 의식도 없어? 이런 거 참여하는 게 대학생의 본분이라고. 강의실에만 앉아서 똥강아지처럼 멍하니 교수님 얼굴만 보는 게 대학생의 전부가 아니야!”

   

그래요. 너 잘났어요. 나는 집요하게 나에게 사회적 관심을 요구하는 남자친구의 손길에 끌려 마지못해 촛불을 들었다. 오, 신이시여, 부디 이 촛불이 크리스마스 촛불이라 여기게 해 주소서.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난생 처음 질문다운 질문을 해왔다.


  “너는 왜 여기 나오는 게 싫은데?”

  “나는 여기 나오는 게 싫은 것 보다 네가 데이트하자고 거짓말하고 나를 여기 데려오는 게 싫어. 너 그런 거짓말 몇 번째야. 기억을 돌이켜보니 내가 매주 금요일에 시청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었더라. 정말 불타는 금요일 밤들이었어. 그렇지?”

  “하아. 데이트는 평소에도 많이 할 수 있잖아. 여기 참여하는 건 지금 아니면 안 되는 거고. 어쨌든 거짓말 한 건 정말 미안해. 그리고 매번 거짓말에도 넘어 와줘서 고맙다. 난 네가 단순해서 참 좋아.”


헤벌쭉 입을 벌리고 웃는 남자친구를 팔로 밀어버렸다. 나는 언제쯤 밤에 분위기 좋은 곳에서 저녁을 먹고 손을 잡으며 청계천을 걸어볼까. 청계천 걷는 일이 그렇게 어려워? 왜 그걸 못해주는데. 속으로 실컷 남자친구 욕을 하다가 그 날 밤도 촛불집회가 끝나면서 동시에 우리의 데이트 시간도 마감했다.



내 사진이 나오면 곤란해


월요일 아침 수업은 고역이다. 하품을 하며 덜 깬 잠을 쫓고자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강의실로 돌아왔다. 마침 들어오던 남자친구가 신문을 들고 오더니 내 옆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책상 좁아. 신문 치워.”

  “토요일 신문인데, 우리 사진 나왔어. 봐봐. 우리 진짜 못생기게 나왔다.”

  “뭐?”


못생긴 것은 원래 못생긴 본판을 가졌으니 그렇다고 치고. 다행히 1면도 아니고 사진이 이 정도 사이즈면 누가 신문에서 날 봤다고 부모님께 말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그날은 친구들과 사진을 보고 웃고 넘겼다. 그런데 며칠 뒤 남자친구가 이번엔 어떤 잡지를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우리 엄청 많이 나왔어. 이번엔 표지에 나왔다?”

  “해맑게 웃지 마. 널 지금 때리고 싶으니까.”


남자친구가 보여준 잡지는 시사주간지였는데 이번엔 표지에 내 얼굴이 호빵만 하게 실렸다.


  “왜?”

  “몰라서 물어? 우리 부모님은 보수적이라서 내가 촛불집회 나가는 거 알면 머리털 다 뽑아버릴 거야! 게다가 용돈도 끊기겠지. 외출 금지될지도 몰라.”

  “음. 그러면 어떡하지? 신문사에 사진을 내려달라고 할 수 있나? 이미 유포되긴 한 건데. 우리 막내 고모한테 물어볼까?”

  “막내 고모?”

  “응. 변호사야.”



공개된 장소에 참가한 사람의 초상은 보호되지 않는다


남자친구를 따라 간 곳은 작은 시장 옆 상가 건물이었다. 오래되어서 그런지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런 곳에 변호사 사무실이 있다는 게 의심스러웠지만 남자친구 고모라니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눈에 띄었다. 고모부가 변호사라는 것을 잘 못들은 건 아닐까 싶었는데 사무실 안에 들어가자 바바리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일하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고모! 나 왔어!”

  “어 오랜만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고모는 요새 영업 안돼서 너 줄 용돈도 없는데?”

  “용돈은 됐고. 사실 내가 지난 주 금요일에 억지로 여자친구를 끌고 촛불집회에 갔거든요. 그런데 그게 참 우리가 잘 어울렸는지 참.”


남자친구는 우리 사진이 실린 일간지와 잡지들을 보여주었다.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이 사진을 지우고 싶다고? 인터넷에서라도?”

  “응! 바로 그거지!”


소파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는 나에게 잘생긴 아저씨가 따뜻한 유자차를 내주었다. 유자차를 호로록 마시는데 별안간 남자친구 고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응? 뭐가 안 돼?”

  “집회나 행렬 또는 행사처럼 공개된 장소에서 사진 찍힌 사람의 초상권은 보호되지 않아. 이 것 말고도 풍경이나 장소에 부수물로 나타난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학생은 왜 이 사진을 인터넷에서 내리고 싶은 거야?”

  “부모님이 보수적이기도 하고. 무서워요! 제가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구나. 아무튼 취할 수 있는 법적 조치는 없어. 이제 선택은 두 가지야. 부모님이 모르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들키면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코피 터지게 싸우든가. 그 게 바로 진짜 시위지!”


그날 큰마음을 먹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결국 부모님은 동네 아줌마를 통해 내 사진을 보게 되었고 용돈을 삭감해 버렸다. 용돈 앞에서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내 시위는 무색했고 나는 매주 금요일 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정다연 그림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