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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 상담 연재

뉴스보도 자료화면에 나온 내 정체, 내연녀도 범죄자도 아닌 일반 시민



뉴스보도 자료화면에 나온 내 정체, 내연녀도 범죄자도 아닌 일반 시민



남편은 나와 달리 돈을 아주 잘 번다. 잘 버는 만큼 바빴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이를 가질 꿈은 시도도 못 할 정도로 바빴다. 나는 덜 버는 만큼 칼 퇴근을 했다. 어쨌든 남편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다. 그날은 남편 생일이었다. 늘 일에 치여 고생하는 남편이 안쓰러워 큰 맘 먹고 남편이 좋아할만한 선물과 이벤트를 준비했다. 어설픈 요리 솜씨로 미역국도 끓였다. 남편은 오늘만큼은 반드시 일찍 돌아오리라 약속했다. 하지만 결국에 나는 다 식은 저녁 식사와 초만 듬성듬성 꽂힌 케이크를 앞에 두고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기다리는 일에 지치고 화가 났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를 밖으로 불렀다. 남편이 혼자 밤을 맞이하길 바라며 신나게 놀 생각이었다. 어디, 집에 왔을 때 혼자 깜깜한 밤을 맞이해보라지.

집 근처 꼬치 집에서 술을 마셨다. 나는 친구에게 남편 흉을 보면서 내 서러움을 토로했다. 술이 술술 들어갔다. 개구쟁이 사내아이 셋을 키우느라 정신없는 친구도 자기 신세한탄을 하면서 밤이 무르익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 일어나다 스텝이 꼬여 다른 테이블에서 막 일어난 중년 남자와 부딪쳤다.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중년 남자가 한껏 취한 목소리로 나에게 욕을 퍼부었다.

  “어디 여편네가 집에서 일은 안하고 밖에 나와서 술을 먹어? 집에 가서 밥이나 짓지 뭐 하러 나와서 애꿎은 사람을 치고 난리야!”

되는 일이 없는 날이라 생각했다. 사과하려 했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사과는커녕 욱하는 성미 탓에 똑같은 수준으로 중년 남자와 싸우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싸움을 말렸으나 이미 말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중년 남자가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더니 내 어깨를 툭툭 밀치며 욕을 뱉은 것이다.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나는 돌고래가 낼 법한 초고음의 비명을 지르면서 중년 남자의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었다. 그 날 싸움의 마무리는 경찰서에서 하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경찰서로 바로 달려왔다. 남편은 나를 힐끗 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 숨을 쉬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중년 남자와 억지로 화해를 하고 나왔다.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걸며 말했다.

  “생일에 좋은 선물 선사하셨네, 조여사님.”

  “죄송합니다. 남편님.”

  “일 마치고 내가 경찰서로 마누라까지 데리러 와야 해?”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불 꺼진 집안에 발을 들였다. 늦었지만 생일 케이크에 켠 초를 불고 미역국은 뒤로 한 채 나도 남편도 침대에 뻗었다. 되는 일이 없는 건, 그 날로 끝난 줄 알았다.



내연녀 범죄사건 보도에 자료화면으로 내 모습이


남편 생일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퇴근 후에 집에 막 도착하자마자 친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얘! 너, 너, 너! 아까 저녁 뉴스에 경찰서에서 뭐 조사받는 장면 나오던데, 무슨 일이야?”

  “내가? 경찰서? 뉴스에 내가 왜 나오지?”

  “내연녀가 불륜관계 있던 남편의 처를 살해했다는 보도인데, 네가 경찰 앞에서 막 고개 숙이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거야! 그 내연녀가 너는 아니지?”

  “언니! 같은 배에서 태어난 언니 맞아?”

  “농담이야. 그런데 어쩌다가 경찰서에 갔어?”

  “그게 말이야…….”

보도에 자료화면으로 내가 나간 일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의 전화는 시작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그 날 이후로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에게서까지 전화가 빗발쳤다. 전화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쏟아지자 나도 남편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일일이 해명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연예인도 아닌데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신경이 예민해졌다.


 


 “여보세요.”

  “어이, 조말숙 여사. 허봉봉 여사한테 들었다. 남편 생일날 술 마시고 난동 피우다 경찰서까지 갔다더니 방송에도 나왔다며?”

  “김변, 그만 놀려. 안 그래도 전화가 빗발쳐서 일을 못하겠어. 남편도 사람들이 자꾸 그 내연녀가 나 맞는지 전화해서 물어본대. 내가 그 보도 생각하면 정말.”

  “이따 우리 사무실에 좀 들려. 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고.”

  “모처럼 변호사답게 행동하겠다는 거야?”

  “응. 근데 빈손으로 오면 안 돼. 중요한 건 가득 찬 양 손이란다, 친구.”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자료화면 속 인물, 정정보도 청구 가능


친구의 소원대로 양 손 가득히 친구가 대학시절 내내 입에 달고 살 던 뻥튀기를 들고 갔다. 역시 내 예상대로 아씨는 뻥튀기가 담긴 파란 봉지를 보자마자 사슴 같은 눈망울로 봉지를 뜯어 뻥튀기를 먹기 시작했다.

  “근데, 아씨야. 너 왜 좋은 로펌 나와서 이런 후미진 곳에 사무실 냈어? 손님이 오긴 와?”

  “다 알아서 와. 내가 대학 다닐 때부터 한 인기 했잖아.”

  “로펌 다닐 때 번 돈은 어쩌고? 너 그 때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지 않았니?”

  “개처럼 벌긴 했지. 정승처럼 썼는지는 모르겠다. 더는 묻지 마. 오랜만에 와선 돈타령이야. 너도 이제 별반 다를 바 없는 아줌마네.”

  “얘는. 난 대학 다닐 때도 이미 아줌마였어. 그런데 이 잘생긴 총각은 누구? 애인?”

  “직원이야. 조여사, 네 경우는 내연녀 살인 사건과 전혀 무관한 너의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쓰였잖아. 이렇게 화면 속 네가 내연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프라이버시권 침해의 대표적인 사례야. 사건과 자료화면 인물이 전혀 관련이 없다는 취지로 방송사에 정정보도 청구를 할 수 있어. 정정보도 청구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 첫 째, 방송사 직접 청구한다. 둘 째,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 신청한다. 셋 째, 법원에 바로 소송을 제기한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

  “다 하고 싶어.”

  “하나만 하시지? 어차피 방송사에 직접 청구해서 안 받아들이면 언론중재위로 넘어가. 거기서도 조정이 안 되면 법원에 소송 거는 수밖에 없어. 손해배상 청구는 언론중재위에 조정신청으로 가능하고, 명예훼손과 프라이버시권 침해를 근거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 어떻게 할래?”

  “사실 이미 방송국에 연락해서 조치 취했어. 지켜보고 결정하기 뭐.”

아씨는 뻥튀기를 우물우물 입안에 넣으며 김이 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그럼 왜 왔어?”

  “오랜만에 친구도 보고 젊고 잘생긴 총각도 보고, 그러려고 왔지!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 총각, 퇴근해요 퇴근!”

  “조여사, 술은 안 돼.” 


정다연 그림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