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만큼 괴로운 고통’ 위로하는
언론은 없나요?
윤여진|언론인권센터 사무처장
지난 열흘 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연을 보도한 내용이 적지 않다. 2월 말 모든 사람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서울 송파동 세 모녀의 죽음, 리얼리티 방송의 그림자를 드러낸 <짝> 여성 출연자의 죽음, 그리고 어떤 연유인지 사랑하는 아들을 두고 떠난 노동당 부대표의 죽음 등.
이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가 정말 부끄러운 자살공화국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 그분들뿐이겠는가. 실낱같은 희망이 없어 스스로 생을 내려놓는 사람들이.
오죽했으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했을까. 그들의 주변에는 죽을 만큼 힘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들어주고 도움의 손길을 줄 만한 사람들은 없었을까.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등등. 인간으로서 그들이 겪은 고통의 크기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남은 가족들은 이 시련을 어떻게 이겨나갈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송파동 모녀에게는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들고, 딸이나 엄마를 잃은 가족들에게는 위로를 건네고 싶은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일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언론에게서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들의 죽음을 다루는 대부분의 언론은 ‘알권리’를 위장해 호사가들의 이야기거리를 찾아 헤매는 들쥐처럼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어떤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자세히 묘사하고, 그들의 생활형편은 어떠했는지 가계부까지 공개하며 보도하는 것이 과연 망자들과 유족들을 위로하는 일이었을까? 노동당 부대표의 죽음에 대한 일부 언론의 모습은 민망하기까지 하다. 망자가 속한 정당에서 생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래서 죽음이 정당한지 등등 죽은 자를 심판하려는 듯 한 모습은 언론이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건사고를 보도하는 언론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잘못된 보도로 인해 2차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언론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자살보도의 경우 또 다른 모방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자살은 그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복잡한 심정과 이유가 막다른 선택에 이르게 했을 것인데, 언론이 이를 단정하여 ‘생활고’때문이고 ‘스트레스’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왜곡의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보도 태도는 모방사건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살 보도와 관련해서는 특별히 보도권고 기준을 만들었다.
2013년 9월 10일 보건복지부는 자살예방의 날을 맞아 <자살보도 권고기준 2.0>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언론은 ‘자살 사건’을 접하게 되면 이 약속은 까맣게 잊고 만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지난 20년 사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배나 증가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수가 1993년 9.3명에서 2012년 28.1명까지 늘어났다. OECD국가 중 8년째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우리사회가 우울한 늪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언론이 앞장서서 그 우울을 부채질 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국가적 노력으로 자살률을 절반으로 줄였다는 핀란드의 사례는 국가적 사회적 노력으로 자살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한다. 다만 통계를 낮추는 문제가 아니라 체계적인 예방시스템이 시급하다. 언론은 자살을 확대하는 역할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언론은 ‘자살’을 보도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자살예방’을 위한 노력을 제대호 하고 있는지 보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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