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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의 친구들

언론피해구조본부 [1] 정(情)에 꾸려가는 ‘언피’ 본부장

정(情)에 꾸려가는 ‘언피’ 본부장


김학웅| 언론피해구조본부장 · 변호사


“뭐가 이렇게 바쁜지 원…”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몸이 오슬오슬 떨려서 며칠 일을 제대로 못했더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돈도 못 벌면서 뭐가 이렇게 바쁜지 원……. 오늘 오후 형사 재판 준비하느라 어제도 두 시간이나 잤나? 아침에 출근해서도 재판 준비 때문에 낑낑거리다 겨우 마무리하고 이제야 짬이 나 청탁받은 원고를 쓴다. 열두시까지는 넘겨야 하는데, 늦으면 또 간사님한테 혼나겠지.

오늘 ‘언피본부’(언론피해구조본부) 회의 내용은 뭐더라? 지난 회의록 들춰보다 깜짝 놀랐다. 아, ‘언론중재법 개정 이후’라는 주제로 내가 발제를 하기로 되어 있었군. 이건 언론중재법이 개정된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자료가 별로 없다고 대충 눙치고 지나가면 될 것인지. 아, 언피본부의 꽃미남 김종천 변호사님 생일이구나. 회의 일찍 끝내고 생일 축하 폭죽이나 터뜨리러 가면 되겠군.

내일 일정을 보자. 오전에 경기대 강의가 있다. 오후에는 기록이 엄청나게 두꺼운 가압류 이의 사건이 있다.

오늘만 이런 것은 아니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모레도 그럴 것이다.

“언피본부 본부장 일을 접으면 그 시간만큼은 조금 여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언피본부 일을 맡은 지도 벌써 햇수로 6년. 아, 그놈의 정 때문에 그만둘 수도 없다.


사마리아인과 집 없는 변호사

게다가 넘칠 만큼의 변론을 못했는데도 승소했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나를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만들어 주는 정말 착한 의뢰인이 있지 않은가.

작년 여름 그 의뢰인과 처음 만났었다. 조용한 주말, 언론인권센터 사무실에서 상담을 했다. 의뢰인은 한여름이었는데도 몸을 떨었다. 반 학생들에게서 받아 온 진술서라며 종이 뭉치를 보여주는데 그간 겪었을 고통과 아픔이 전해져와 나는 그의 편이 되어 상대 신문사에 흠씬 욕을 해줬다.

바쁜 시간을 쪼개는 든든한 변호사님들이 있고, 호랑이 같지만 큰형님 같은 이사장님, 큰 누님 같은 상임이사님, 이사장님 앞에선 다른 소리 못하지만 나만 보면 호랑이가 되는 처장님 그리고 팀장님, 간사님.

그래, 내 집 장만의 꿈은 또 다시 요원해졌지만 아무렴 어떤가. 내가 언제 내 집에서 살아봤던가? 이사 다니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집값 떨어진다고 걱정할 일 없으니 좋고, 철없는 아들내미가 새집으로 이사 간다고 좋아하니 좋고, 아내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 나름으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들어오세요, 어. 그거 뭐예요? 오늘은 오후 4시30분 재판밖에 없는데요?”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산다. 대한민국 변호사 누구나 그러하듯이. 언피본부 변호사 누구나 그러하듯이. 벌써 열두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