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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의 친구들

언론피해구조본부 [2] 사막에서 만난 사마리아인

사막에서 만난 사마리아인


장은아 |회원·일산 정발고등학교 교사


두 번 다친 마음

년에 저는 고3 담임이었습니다. 그리고 6월에 제가 수업하는 작문시간에 저희 반 녀석 하나가 돌연 쓰러졌고 그대로 가 버렸습니다. 참으로 허망하고 믿을 수 없는 이별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마도 뇌혈관이나 심장혈관의 기형에 의한 돌연사일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아이를 보내고 거의 정신을 놓고 지낸 얼마 후, 누군가 신문에 기사가 났다고 했습니다. 관심을 두지 않다가 들어가 보니 ‘메트로’라는, 저로서는 생소했던 지하철무가지에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제목으로 저에 관한 칼럼이 실려 있었습니다.

중요 내용은 죽은 아이는 평소 말썽을 피우던 아이인데 전날 과음을 하여 담임교사에게 조퇴를 청했으나 교사는 꾀병이라며 허락해 주지 않았고 아이는 보건실을 찾아갔지만 보건교사가 문을 잠그고 외출을 하였고 쓰러진 후에는 누구도 응급처치도 하지 않고 방치하여 아이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칼럼 내용이 사실과 너무 달라서 처음엔 한심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과소평가한 그 신문의 파급 효과는 의외로 컸습니다. 주변 학교는 물론이고 멀리 떨어져서 이제는 연락도 소원해진 이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실명이 실리지 않았지만 저인 줄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 달 뒤에는 미국에 이민 간 친구로부터도 연락이 왔습니다.

멀쩡한 한 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원인 제공자가 따로 있었다는 신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싸해 보였을 것입니다. 저희 반 학생들까지 그 기사를 돌려 읽는 것을 보고 큰 배신감도 느꼈습니다. 나를 뻔히 아는 너희들이 어떻게 확인도 안 해 보고 그 기사를 믿을 수 있느냐는 섭섭함이 사무쳤습니다.

점점 제 마음 속에는 분노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식어 갔습니다. 학교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꺼리는 분들은 제가 조용히 있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교원단체에도 도움을 의뢰했지만 부정적인 말만 해 주었습니다. 소송을 하면 제가 불리하며 엄청난 비용이 들고 재판과정에서 고통이 클 것이라 했습니다.


마지막
노크

그 때 정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언론인권센터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도 끝내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을지 모릅니다. 우연히 알게 된 언론인권센터에서 저의 은인이신 김학웅 변호사님과 윤여진 사무처장님을 뵙게 되었고, 당연히 그들의 잘못을 응징해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변호사님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시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저 대신 화도 내 주시고 욕도 해 주셨습니다. 게다가 저의 소송비용까지 센터에서 후원해 주셨습니다.

소송을 하면서 언론을 대상으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을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승소할 수는 없더라도, 그들이 좀 귀찮기라도 해야 한다는, 그래서 다음에 또 글을 쓸 때는 함부로 쓰지 못 하거나 한 번 정도 멈칫하게 해야 한다는 바람으로 과정을 견뎠습니다. 하지만 김학웅 변호사님의 출중함 덕분에, 저의 바람을 훨씬 넘어서서 승소하였고, 그 신문사는 정정기사를 싣고 저는 약간의 배상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교사입니다

승소로 인해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정정기사는 났지만 그 원래의 칼럼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정기사를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저는 조금이지만 상처도 더 받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일에서 저는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도움을 받은 일이 창피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교사일 수 있습니다.

언론인권센터 회원 여러분,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언론보도 피해자들이 세상을 혐오하는 대신 맞서 싸우고 계속 살아나가도록 돕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막에서 걷기를 포기하고 웅크려서 모래 속에 파묻히려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