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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 상담 연재

아르바이트로 한 출연 때문에 180도 달라진 삶


아르바이트로 한 출연 때문에 180도 달라진 삶


돈이 필요했다. 매달 고시원 방값으로 내는 비용 30만원, 한 달 생활비와 용돈 최소 30만원. 지방에 계신 부모님은 이혼 후 연락조차 어려웠다. 새 가정을 꾸리신 아버지는 내 대학 등록금을 주는 것도 벅차다고 하셨다. 매달 60만원을 벌기 위해 나는 학교 수업을 듣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아르바이트 하는 데 쏟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주는 곳을 찾기 위해 구인광고 사이트를 매일 뒤적였다. 그러다 케이블TV에서 하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를 구한다는 모집을 봤다.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페이도 높아 18만원을 준다고 했다. 출연은 단 하루면 됐다.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촬영 당일, 작가는 이 프로그램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 일반인이 마치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굴과 목소리를 그대로 공개하면 더 높은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촬영 내용은 남자 연기자가 밤에 홍대 거리에서 설정 상 처음 만난 여자 연기자에게 즉석으로 호텔에 가자 제안을 하면, 여자 연기자가 망설이는 척 하다 호텔로 따라 들어오는 것까지라고 했다. 나는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목소리는 음성 변조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촬영을 하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제작진이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어차피 가상 상황이고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음성변조도 하니까 시청자들이 못 알아볼 것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연출된 리얼리티 때문에 덧씌워진 ‘원나잇女’라는 별명


내 촬영분이 방송에 나온 날, 나는 깜짝 놀랐다. 화면 속에 비춰진 나와 남자 연기자의 연기는 촬영 당시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게다가 내 얼굴이 모자이크가 잘 되지 않았고 목소리는 음성변조 되어있지 않아 금방 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상의 상황 연출인지라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는 개강을 했다. 그런데 수업을 듣는 내내 학교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한 친구가 학교 친구들 사이에 리얼리티를 표방한 케이블TV 프로그램에 나온 ‘원나잇女’가 나라는 소문이 퍼졌다고 말해줬다. 연출된 상황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정말 모르는 남자를 따라 같이 놀고 쉽게 스킨십하고 호텔에 가는 여자라고 믿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해명할 기회도 없이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친했던 사람들도 점점 나를 기피했다.

심지어 오랫동안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남자 점장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처음엔 참았다. 불편하고 불쾌했지만 참고 또 참았다. 왠지 그 케이블TV 프로그램을 본 것 같다는 추측을 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서러웠다. 남들은 부모님께 받아서 쓰는 고작 그 18만원 벌어보겠다고 주변에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로 낙인찍힌 게 억울했다.

주변에 내 입장을 이해해주고 옹호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는 중이라며 바쁘다고 금방 끊어버렸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굉장히 반갑게 나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 들리는 아빠의 새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모자이크와 음성변조를 제대로 하지 않은 데 대한 계약 위반

그리고 초상권 침해


해가 막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고시원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학교 건물 꼭대기 층으로 갔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꼭대기 층에 있는 옥상으로 나갔다. 옥상 난간위로 올라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이대로 떨어지면 누군가 내 억울함을 알아줄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어릴 적에 엄마와 아빠와 함께 행복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눈을 감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눈을 감으니 더 무서웠다.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셌다. 십, 구, 팔, 칠….

  “학생, 죽지 마. 무슨 일 있는 거야? 여기서 지금 학생이 죽으면 나는….”

눈을 떠보니 긴 바바리코트를 입고 입에 막대사탕을 문 여자가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을 채 서 있었다. 여자가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내민 채 내게 내민 손을 잡고 난간에서 내려왔다.

  “학생이 죽으면 나는 자살방조죄야. 근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거기 막상 올라서니까 무섭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서럽게 울었다. 그 여자는 한참을 내 옆에 있어주었다. 며칠 뒤 나는 명함을 찾아 여자가 일하는 곳을 찾아갔다. 경황이 없었지만 그 때 들었던 얘기에 따르면 여자는 우리 학교가 모교이고 자신은 이번 학기부터 법학과에서 판례 수업을 강의하는 현직 변호사라고 했다. 시장 끝 상가에서 겨울 찾았다. 변호사 사무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어. 왔어?”

그 날 변호사님은 얼핏 말했던 내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리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다시 만난 변호사님은 케이블방송 프로그램 제작사에 소송을 제기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또 울었다. 난생 처음 본 나를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더 재밌을 것이라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것. 그것만으로 나는 가슴이 벅찼다. 내가 연신 고맙다고 말하자 변호사님은 무심하게 말했다.

  “별로 안 고마워해도 돼. 이 건 아주 중대한 문제야. 모자이크와 음성변조의 목적이 뭐겠어? 시청자가 못 알아보게 하고 출연자의 초상권을 보호하기 위한 거라고. 그런데 계약을 해놓고 모자이크도 허술하게 하고 음성은 아예 그대로 나갔잖아. 엄연한 계약 위반이고 초상권 침해야. 소송에서 이기면 합의금에서 변호사비용 충당할 거야. 그러니 아무튼, 고마워할 필요 없다고.”


정다연 그림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