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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에게 물어봐/미디어 이야기

열린 문서 캠페인을 아시나요?


열린 문서 캠페인을 아시나요?

민경배
| 경희사이버대학교 NGO학과 교수


예전에 삼성에서 개발한 ‘훈민정음’이라는 문서 편집 프로그램이 있었다. 국내에서 막강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아래아 한글’의 시장 점유율만큼은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나름대로 꽤 많은 이용자층을 가지고 있던 문서 편집 프로그램이었다. 요즘은 이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깔아놓고 사용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프로그램 자체도 여간해선 구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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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자 입장에서야 시장에서 쇠퇴한 프로그램은 더 이상 안 쓰면 그만이다. 그런데 문제가 남아 있다. 과거에 훈민정음 프로그램으로 작성되어 gul이라는 확장자로 저장된 문서는 이제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을 잘 뒤져보면 ‘훈민정음 뷰어’라는 프로그램을 다운받을 수 있다. 하지만 뷰어 프로그램인 만큼 읽기 기능만 있지 쓰기 및 편집 기능은 제공되지 않는다. 꼭 봐야 할 중요한 문서가 아닌 다음에야 여간해선 뷰어 프로그램을 일부러 찾아 설치하는 정성을 기대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독자적인 포맷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하나가 시장에서 쇠퇴하자, 그 프로그램으로 작성된 수많은 문서들도 더 이상 사람들에게 읽혀지지 않은 채 사장되어 버리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널리 쓰이고 있는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은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까? 필자는 얼마 전 유럽에서 열린 국제 컨퍼런스 참석 중 이와 관련해 곤란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이메일을 확인하려고 행사장 로비에 마련된 인터넷 부스를 찾았는데, ‘아래아 한글’ 문서가 첨부된 중요한 메일이 하나 있었다. 외국이니 당연히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이 컴퓨터에 깔려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문서를 읽기 위해서는 인터넷에서 한글 뷰어 프로그램을 찾아 설치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겨우 설치를 마치고 문서를 확인해 보니, 표의 빈 칸에 몇 가지 내용을 입력하여 곧바로 다시 보내줘야 하는 내용이었다. 한글 뷰어 프로그램에는 쓰기와 편집 기능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다. 하는 수 없이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는 ‘MS워드’ 프로그램을 띄워, ‘아래아 한글’ 문서에 있는 표를 다시 똑같이 그려 넣고 내용을 입력해서 전송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각각의 문서 편집 프로그램마다 독자적인 파일 포맷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마침 얼마 전부터 정보통신 운동단체인 <진보네트워크>와 <정보공유연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열린 문서 캠페인”이란 것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문서를 작성할 때 ‘아래아 한글’의 hwp나 ‘MS워드’의 doc 같은 특정 회사의 독자적인 파일 포맷 대신 txt나 HTLM, pdf 등 공개된 표준 파일 포맷을 널리 이용하자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문서는 누군가와의 소통을 위해 작성되는 것이니만큼, 표준 파일 포맷을 채택해 문서를 작성한다면 어떤 컴퓨터 환경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하던 누구나 손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열린 문서 캠페인”은 자칫 ‘아래아 한글’이나 ‘MS워드’ 같은 특정 문서 편집 프로그램을 배격하자는 운동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문서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하는가는 이 캠페인의 기본 취지와 무관한 일이다. ‘아래아 한글’이나 ‘MS워드’로 작성한 문서라도 저장할 때 파일 포맷을 hwp나 doc가 아닌 txt로만 설정해주면 다른 문서 편집 프로그램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래아 한글’이나 ‘MS워드’ 프로그램 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리눅스 기반 컴퓨터 이용자들에게는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사안이다. 그동안 특정 문서 편집 프로그램에 익숙해져 있는 이용자들에게 “열린 문서 캠페인” 동참을 요구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습관이란 들이기 나름이다. 조금만 신경 쓰면 보다 자유롭고 폭넓은 문서 유통이 가능해진다. ‘아래아 한글’ 문서에 있는 표를 뷰어 프로그램으로 보면서, 다시 ‘MS워드’에 그려 넣는 무식한 작업만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시사IN, 제47호, 200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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