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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에게 물어봐/미디어 이야기

디지털 참여와 대의정치가 만날 때


                   디지털 참여와 대의정치가 만날 때


                                                                           민경배 | 경희사이버대학교 NGO학과 교수


인터넷을 통해 분출된 성난 촛불 민심은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얼마나 높은지 말해 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터넷이 열어준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보수 논객 이문열은 이러한 우려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위대한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다. 그러나 본질은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비슷한 입장이 진보 진영 일각에서도 제기되었다. 진보 정치학계의 거목 최장집 교수가 정년퇴임 고별 강연에서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그는 “촛불시위는 민주화 이후에 선거, 정당, 대표, 책임 원리 등의 민주주의 제도가 실패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 분석하면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대의적 민주주의 체제이며, 운동이 항시적으로 그 역할을 대신해서 수행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접 민주주의의 확대보다는 정당 정치의 복원과 활성화가 시급한 과제라는 주장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보수 논객 이문열씨의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과 진보적 학자 최장집 교수의 “정당 정치 수렴론”이 촛불 시위를 통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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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시위를 보며 인터넷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환호했던 젊은 학자들이 곧바로 최장집 교수 발언에 대한 반론들을 쏟아냈다. “정당 정치 수렴론은 낡은 보수주의이다”, “잘못된 정당 정치로 인해 파생된 문제를 정당 정치로 수렴하고 해결하자는 것이다”, “정치를 선거와 정당으로 협소화시켰다”, “광장에서 이론을 구성하지 않고, 이론에서 광장을 유추하고 있다” 등 격한 표현들까지 나왔다. 그런데 최장집 교수의 “정당 정치 수렴론”을 옹호하는 입장과 “인터넷 직접 민주주의론”에 주목하는 입장 사이에도 공통점이 발견된다. 양 자를 제로섬(Zero-Sum)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터넷 직접 민주주의 확대는 곧 정당을 통한 대의 민주주의의 위축을 의미한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터넷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의 대체재가 아닌 보완제 관계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대의 민주주의는 진작부터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은 시민들의 인터넷 직접 민주주의 열망을 전자적 방식으로 제도권 정치에 담아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직접 민주주의라 해도 디지털 시민들이 처음부터 무조건 거리로 몰려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참여 행위는 일단 온라인을 통해 정치권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때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기관과 각 정당, 국회의원들의 홈페이지 등이 디지털 시민참여와 대의 민주주의를 연결하는 온라인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대의제 온라인 매개체들의 소통 기능이 원활히 작동되기만 한다면 시민 참여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는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결국 대의 민주주의는 인터넷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수렴함으로써 보다 더 진일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이러한 기능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었다. 시민들이 정부나 정치인들과의 직접적인 온라인 소통 대신 다음 아고라에서 자신들만의 공론장을 펼친 것도 그동안 대의제 온라인 매개체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제기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지 인터넷 직접 민주주의 움직임이 확대됐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시민 참여라는 변화된 패러다임을 제도권 정당들이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인터넷은 잘만 활용하면 대의 민주주의에게 위기가 아니라 지금의 낙후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아날로그 정치는 깨달아야 한다.

(시사IN 제45호, 200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