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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의 친구들

친전(親展)


[언론인권센터 사람들] 신동진 영상미디어위원장(다큐멘터리 감독)


 친전(親展)

 신동진 영상미디어위원장 (다큐멘터리 감독)

요즘도 봉투 표면에 ‘친전’(親展)이라고 따로 써서 편지를 보내는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지껏 그런 친전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만, 이전에 그런 친전편지를 받고 뜨끔(?)했던 분, 친전편지를 보낸 뒤 성실한 답신을 받고 흐뭇해하는 분의 얘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그 때 ‘친전’이라는, ‘편지를 받을 사람이 직접 펴보라’는 주문이 만들어내는 묘한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습니다.
e메일이 보편화돼 있고, 직접 펜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드문 시절에 ‘친전’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이전만큼의 ‘힘’을 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처럼 모든 사안마다 날선 대립이, 그것도 합리적인 해법도출과는 거리가 먼 감정적이고 이분법적인 싸움이 줄이어 벌어지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친전’의 위력을 한 번 빌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보편화된 e메일이 이미 ‘친전’의 형식을 갖고 있고, 웬만한 공인(公人)과 언론방송인, 기타 오피니언 리더들의 e메일 주소를 알아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뭔가 이슈가 생겼을 때 그 이슈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에게 은밀하고도 정중하게, 사실에 입각한 자신의 견해와 애정을 담은 ‘친전’을 보내는 것입니다. ‘친전’에 무슨 협박성 문구를 넣고 싶은 분도 계시겠지만 그것은 참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복권당첨’은 못돼도 ‘변화의 씨앗’은 되지 않을까요?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사실 나도 당신의 그런 지적에 동의하는 바가 있다”, “미처 내가 생각지 못했던 점을 친절하게 지적해줘서 고맙다”, “이번 기회에 당신이 날 얼마나 배려해주는지 알게 됐다” 등등 뭐 이런 유의 답신을 받게 된다면 복권이라도 당첨된 기분일 것입니다. 일부는 ‘친전’을 보낸 사람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과 근거를 제시하면서 논쟁적인 회신을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회신을 보낸 분의 공개입장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은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대다수의 경우는 회신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편지를 받은 분의 가슴 속에 긍정적 변화의 씨앗이 이미 뿌려지지 않았을까요?
저의 이런 제안을 보고, 제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너무 갖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물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얘기는 공개회의가 아닌 비공개회의에서 그리고 더 중요한 얘기는 뒤풀이 자리에서 거론되곤 하는 우리네 토론문화의 특성을 생각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 조직과 상황의 논리에 복무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에게 공개적인 일탈을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약육강식’보다는 ‘상호부조’가 인류에게 더 큰 발전을 가져다 줬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만약 ‘친전’에 담았던 내용을 공개적인 지면이나 인터넷에 공개질의 형식으로 해버린다면, 공개석상에서 토론하게 된다면, 법정에서 다투게 된다면, 논쟁 당사자들은 주목을 받고, 논쟁의 양편에서 환호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상대방 공격의 합리성은 묻혀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계속 보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 제3의 중재안이 들어설 여지는 줄어들고, 수(數)의 우위를 앞세워 한쪽 입장을 관철하거나, 설령 제3의 안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형식적 타협으로 누더기를 만들어놓곤 하지요.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하고, 듣게 됩니다. ‘그래 당신 말 맞는지 알아, 그런데 현실이 어디 그런가.’
우리 안의 합리성과 공공성 그리고 양심을 긍정적으로 촉발시킬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의 하나로 ‘친전’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