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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별 상담 연재

헤어진 여자 친구와의 과거사가 뉴스 날씨 정보 화면으로



헤어진 여자 친구와의 과거사가 뉴스 날씨 정보 화면으로


단란한 가정을 꿈꿨다. 엄마는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일찍이 나와 여동생 승아를 두고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집을 떠났다. 나와 승아는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빠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후의 삶은 단지 엄마가 없다는 것 빼고는 평탄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나는 반항 없는 사춘기를 보냈고 동생 또한 사근사근한 성격에 친구들과 잘 지내고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우리는 아빠의 희망대로 장학금을 받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학에 갔다. 역시나 평범하게 대학생활을 보냈고 무난하게 졸업을 했다.

문제라고 할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평범한 나에게 특이 사항을 찾는다면 그건 바로 연애를 3개월 이상 못한다는 사실이다. 떠나간 여자 친구들은 나를 원망했다. 내가 표현할 줄도 모르고 심지어 사랑할 줄도 모른다고 나무랐다. 처음에 나는 내가 단지 나이가 어려서 연애가 서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는 연애를 잘 하지 못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고 느꼈다. 점점 연애가 어려웠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 외의 다른 일은 능숙하게 잘 해냈다. 회사에서 일 잘하고 싫은 내색 한 번 안하는 좋은 후배가 되었고 입은 무겁고 지갑은 잘 여는 선배가 되었다. 집에서는 노쇠한 할머니와 아버지 앞에 자랑스러운 장남이 되었고 여동생이 결혼할 땐 든든한 오빠가 되었다. 다들 나에게 결혼을 재촉할 때 나는 다시 기로에 섰다. 여전히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겐 쉬운 일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다. 그 때 주희를 만났다.

 “미안, 늦었지? 밖에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작년에 헤어진 여자 친구가 어젯밤 갑자기 만나자고 했다. 칠흑처럼 긴 생머리에 빗방울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녀가 옷을 적신 비를 툭툭 털었다.

 “직장은 그만뒀다며? 요즘 뭐하고 지내?”

그녀를 기다리느라 차갑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한동안 쉬다가 새로 개업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어.”

 “그래. 다행이야, 좋아 보여.”

 “너는?”

너는 이라고 질문하기도 전에 주희는 하얀 카드를 내밀었다. 보나마나 청첩장이겠지.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좀 곤란하게 됐어. 다음 달이 결혼인데, 어제 뉴스를 보다가 날씨 정보 화면에 우리가 나오더라. 우리는 분명 2년 전에 헤어졌는데 말이야. 그런데 날씨 배경화면에선 우리가 낙엽을 밟으면서 정동길을 걷고 있더라고. 참 재미있어, 그렇지?”

나도 그녀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씁쓸했다. 식은 커피로 입술을 축였다.



과거의 그 자리에서 멈춘 뉴스 날씨 화면


주희는 나에게 사랑을 확인하게 해준 첫 여자였다. 그녀는 나의 인생 자취를 돌아보며 꾹꾹 도장을 찍듯 과거의 나로부터 현재의 내 모습까지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삶을 서로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따금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안의 변화를 알아차릴 정도로 나에게 사랑과 인내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이야기했다. 구름 위를 걷는 나날들이었다. 놀이공원에나 가야 먹을 수 있는 솜사탕을 매일 먹고 싶을 때 마음껏 먹는 기분이었다고 하면 상상이 될까. 하지만 꿈은 깨졌다. 주희와의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출산을 앞둔 여동생 부부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여동생과 조카가 될 뱃속의 아이는 즉사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깊은 어둠속에서 홀로 헤맸다. 그 사이 주희는 나를 떠났고 직장에선 쫓겨나다시피 그만두어야 했다.

 “시어머니가 우연히 그 날씨 화면을 본 모양이야. 단단히 화가 나셨더라고. 남편이 채근해서 좀 전에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어. 내 말은 사람 말로 듣지 않는 집이거든. 변호사가 그러더라. 거리의 행인을 대상으로 한 자료화면은 초상권 침해로 보기 어렵다고. 공공장소에서 사람은 그 장면의 부수적인 부분일 뿐이라서 문제 삼을 수 없대.”

 “그런데 왜 연락한 거야?”

 “남편이 곧 올 거야. 남편 앞에서 똑바로 좀 얘기해줘. 우리, 이제 다 끝난 사이라고.”

아름다웠던 기억이 파편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 여자는 어디로 간 걸까. 사람 구실 못하는 내가 못 견디겠다며 떠나는 것 까진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었다. 내 잘못이니까. 하지만 몇 년 만에 연락해 청첩장을 내밀고 남편이 될 사람 앞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달라고 하는 이 여자는 누구인 걸까. 내가 사랑했던 그 여자가 맞는 걸까?



공공장소에서 배경의 일부로 사용된 경우에는 초상권 침해로 보기 어렵다


나는 비가 쏟아지는 창밖만 쳐다보았다. 카페 건너편에서 한손에 우산을 들고 한손으로는 우산을 쓴 여자가 빗물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카페 안에서 여자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킥킥 웃었다. 창문에 낀 김을 닦아내자 얼굴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카페 문 밖으로 성급히 걸어 나갔다.

 “변호사님!”

 “아, 저기 창가에 붙은 애송이들이 내가 넘어졌는데 천사 같은 얼굴로 이빨 미소를 보여주었단 말이지? 어디 교복 입은 애들이야!”

 “그러게 왜 나오셨어요? 연락하면 커피 알아서 사갈 텐데.”

 “우산 안 들고 나갔잖아. 커피는 내가 알아서 사가겠습니다. 하시던 일 보세요.”

카페 안에 들어서는 와중에도 변호사님과 티격태격 실랑이를 벌였다. 변호사님이 창가에 앉아 넘어지는 자기를 비웃었던 여학생들을 혼내줘야겠다고 우겼다.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주희가 다가왔다. 그녀가 변호사님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변호사님, 또 뵙네요?”

 “아까 그 분?”

나는 주희를 쳐다보았다. 오기 전에 들렀다는 변호사 사무실이 우리 사무실이었단 말인가. 기가 찼다. 주희가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남편이 바빠서 못 온대. 오랜만에 본 건데 실례가 많았어. 잘 지내는 것 같네. 난 그만 가볼게.”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는 주희를 향해 변호사님이 눈치 없이 소리쳤다.

 “정동길 장면은 풍경의 일부라서 어떻게 할 수 없지만요, 남편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얼마든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시면 그 때 꼭 다시 들러주세요!”

변호사님이 고용주만 아니라면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영업 멘트를 발휘하는 변호사님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정다연